홍세화 저
“생각의 좌표” 중에서
스페인의 한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는 지극히 좁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옥에 하나의 창이 나있다. 놀랍게도 이 창은 모든 세계와 만나게 해준다. 바로 책이라는 이름의 창이다.”세상 사람들 중 책을 읽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소수다.
문제는 과거에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날엔 책을 읽지 않아도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엔 제도교육이 보편화되었고 미디어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람들의 의식세계는 빈 채로 남아 있지 않고 채워진다.
나는 유소년 시절에 할머니 할아버지 뻘 되는 분들이 “나는 무식해. 아무것도 몰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종종 들었다.
오늘날엔 그런 분을 만날 수 없다.국가권력이 장악한 교육제도와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미디어에 의해 넘칠 정도로 채워지는 의식세계는, 특히 한국처럼
제도교육이 민주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스스로 책을 읽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지배세력이 요구한 것만으로 채우게 된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지 못했지만 지배세력이 요구한 내용으로 채우지도 않았다. 설령 채웠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이뤄지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지배세력에 대한 복종의 자발성에서 과거에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보다 오늘날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더 강한 것은 그 때문이다.